"보통 궁궐은 오전 9시에 문을 엽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창덕궁을 깨운 첫 손님이죠. 환영합니다."
지난 달 29일 오전 8시께 창덕궁 금천교 앞.
평소 관람객이 오가는 정문 돈화문이 아니라 금호문을 지나온 사람들을 향해 이시우 작가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창덕궁 안에는 '손님' 40여 명뿐이었다.
치열한 '궁케팅'(궁과 티켓팅을 합친 말)을 뚫고 온 이들은 올해 궁중문화축전 행사에서 처음 선보이는 '아침 궁을 깨우다' 프로그램 첫날 행사 참가자들이다.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창덕궁의 아침을 깨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설렘이 묻어났다. 이제 갓 2살이 된 딸과 한복 저고리를 맞춰 입은 엄마도 눈에 띄었다.
금천교를 지나 창덕궁의 핵심 건물인 정전(正殿·왕이 나와 조회하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건물)인 인정전에 들어서자 도심의 소음은 어느새 사라진 듯했다.
이 작가는 "등을 돌려 품계석(品階石·품계를 새겨 정전 앞뜰에 세운 돌)이 있는 마당과 인정문을 봐달라"며 "지금 보는 모습이 조선시대 왕의 바라봤을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선정전, 희정당 등 창덕궁 곳곳으로 이끌며 건물의 역사와 의미를 소개했다.
낙선재에서는 각기 다른 모양의 문살, '자연의 캘린더(calendar·달력)'라고 불리는 계단식 화단 등을 소개하며 창덕궁에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침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고즈넉한 후원 일대였다.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가 어우러진 후원 일대는 창덕궁 안에서도 특히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드라마를 볼 때 1회는 흥미진진했는데 갈수록 재미없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창덕궁 산책은 마지막까지 예쁘고 감동적입니다. 후원이 있기 때문이죠." (웃음)
정조(재위 1776∼1800)가 낚시를 즐겼다고 하는 정자인 부용정과 연못 일대, 왕의 만수무강을 염원하며 세운 불로문, 지붕과 기둥이 모두 겹으로 된 존덕정 등을 둘러보자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후원 숲길을 따라 도착한 돈화문 일대는 어느새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정석진 씨는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궁을 만날 기회라 생각해 딸에게 부탁해 겨우 예약했다"며 "옛 시간을 걷는 듯한 감동과 앎이 어우러진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올해 9일간 열린 궁중문화축전에서 선보인 공예 전시 역시 창덕궁을 색다르게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구병준 감독이 기획한 '공생(共生) : 시공간의 중첩' 전시는 인정전, 선정전, 성정각을 무대로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와 전통공예 작가 9명이 함께 작업한 작품을 소개했다.
국보로 지정된 인정전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27일 찾은 인정전은 왕이 앉는 어좌(御座) 좌우로 전통 조명인 좌등 형태를 활용한 공예품 8점이 늘어서 있었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조명 너머로는 '둥둥' 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는 거울과 비슷한 소재의 판이 깔려 건물 내부 기둥과 천장이 비치는 듯했다. 관람객들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먹 향을 느끼며 과거 왕이 머물렀던 공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구 감독은 "창덕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시각, 청각, 후각까지 모두 활용했다. 과거의 시공간을 오늘날 색다르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이 놓인 각 건물에는 궁중문화축전 행사 관계자들이 자리를 지키며 관람객에게 작품의 의미와 전시 목적 등을 설명했다. '원래 있었나', '신기하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친구와 함께 인정전을 둘러보던 정윤경 씨는 "국보 건물을 전시 배경으로 활용한 모습을 보니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라며 "다시 한번 오고 싶다"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앞으로 축전 기간에 창덕궁을 소개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선보일 계획이다. '아침 궁을 깨우다'는 매년 봄·가을에 정례적으로 할 예정이다.
2015년 첫 축전이 열린 이래 개막 행사는 늘 경복궁 일대에서 해왔으나, 추후 창덕궁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결혼정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