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


미국 연방대법원이 2015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오버거펠 대 호지스(Obergefell v. Hodges)’ 판례를 폐기해 달라는 청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미국 내 동성결혼의 법적 지위는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이번 결정은 보수 성향이 강화된 현 대법원에서도 사회적 합의가 깊이 자리 잡은 ‘결혼평등 원칙’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현실을 확인시켰다.

이번 청원은 미국 켄터키주 전 카운티 서기인 킴 데이비스(Kim Davis)가 제기했다. 그는 2015년 동성커플에게 혼인허가증 발급을 거부해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이후 소송에서 패소하자 연방대법원에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재검토를 요청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별도의 의견서나 반대의견 없이 이를 기각했다. 미국 언론들은 “법원이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이 사안을 다시 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라 분석했다.

대법원이 청원을 받아들이려면 최소 4명의 대법관이 동의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현재 대법원은 보수 6명, 진보 3명으로 구성돼 있으나,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동성결혼을 뒤집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결혼제도가 이미 전국적으로 자리 잡고 수백만 명의 동성 부부가 법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한 상황에서 판례를 뒤집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신중론이 우세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각을 단순한 절차적 판단을 넘어 ‘사회적 합의의 확인’으로 해석한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동성결혼 제도는 이미 미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렸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70% 이상이 동성결혼을 지지하며, 보수층에서도 찬성 비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대법원이 법적 안정성을 우선시함으로써 혼인평등 원칙이 더 공고해졌다”고 평가했다.

다만 보수 성향의 일부 주(州)에서는 여전히 동성혼 제도를 제한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관련 조항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면책 조항’을 강화해, 공공기관이 동성커플에 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처럼 결혼평등의 법적 기반은 유지됐지만, 종교·윤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번 기각은 미국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변화의 여지를 남겼다. 헌법적 권리로 확립된 동성결혼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때마다 대법원이 최종 방파제 역할을 해왔지만, 판례는 언제든 새로운 정치 구도나 사회 변화에 따라 재검토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은 “대법원이 사회의 다수 의사에 반하는 급격한 후퇴를 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번 판결은 시사점을 던진다. 법적 제도와 사회 인식의 괴리가 클수록, 제도 변화는 오랜 시간과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다양한 가족 형태, 비혼 동거, 동성 파트너십 제도 등을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이번 미국 사례는 제도적 논의가 가치 충돌을 넘어 인권과 평등이라는 기본 원칙에서 출발해야 함을 보여준다.

미 연방대법원의 이번 결정은 동성결혼 합법화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음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법과 사회가 함께 진화할 때, 권리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사랑과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있다.